친구가 시키는 일을 싫어하면서도 따라가고, 물건을 빌려준 뒤 돌려달라는 말을 못 하고, 단체 채팅방에서 불편한 부탁을 받아도 웃으며 넘기는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
하지만 아이에게 문제는 문장을 몰라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거절하는 순간 친구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렵고, 상황을 판단할 시간이 부족하거나, 상대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성은 모든 사람에게 맞춰주는 능력이 아닙니다. 상대의 마음을 존중하면서도 내 감정·몸·시간·물건에 대한 선택권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착한 아이’와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다릅니다
양보와 배려는 좋은 사회적 능력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매번 불편함을 참아야만 관계가 유지된다면 그것은 배려라기보다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한 순응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다음 장면이 반복되는지 살펴보세요.
- 싫은 놀이인데도 친구가 하자면 따라간다.
- 돈이나 물건을 빌려주고 돌려달라는 말을 못 한다.
- 놀림을 받아도 함께 웃고 집에 와서 속상해한다.
- 친구가 화낼까 봐 자신의 의견을 자주 바꾼다.
- 단체 채팅방의 요구에 바로 답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 친구 관계가 끝날까 봐 위험하거나 규칙을 어기는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한두 번의 양보만으로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선택권이 있었는지, 그리고 선택한 뒤에도 안전하다고 느꼈는지입니다.
아이는 왜 “싫어”라는 말을 알고도 못 할까?
1. 거절을 관계의 끝으로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또래 집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 할래”라고 말하면 친구가 떠나거나 자신만 제외될 것이라고 예상하면, 불편함을 참는 쪽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2. 상황을 읽고 문장을 꺼내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부탁을 받으면 몸이 먼저 얼어붙거나 웃어버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집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지만 실제 장면에서는 생각과 말이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3. 자신의 불편함을 늦게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싫었는지 집에 돌아온 뒤에야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계 세우기는 말하기 기술 이전에 몸의 긴장, 표정, 속도, 마음의 불편함을 알아차리는 연습에서 시작합니다.
4. 거절해도 관계가 유지된다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문장을 한 번 배웠다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에게는 거절한 뒤 상대가 받아들이고, 다른 선택을 하며, 다시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경험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사용할 수 있는 3단계 거절 문장
길게 설명하려 하면 아이의 부담이 커집니다. 처음에는 세 단계만 연습해도 충분합니다.
1단계: 잠시 멈추기
- “잠깐만, 생각해 볼게.”
- “지금 바로 대답하기는 어려워.”
이 문장은 시간을 벌어줍니다. 바로 ‘예’라고 대답하는 습관이 있는 아이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2단계: 짧게 선택 말하기
- “나는 그건 안 할래.”
- “그건 빌려주기 어려워.”
- “그 말은 불편해. 그만해 줘.”
거절에는 긴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크게 내기보다 짧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3단계: 대안을 제시하거나 자리를 벗어나기
- “그건 안 하고 다른 걸 같이 하자.”
- “나는 여기까지 할게.”
- “계속 그러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할 거야.”
대안은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이 될 수 있지만 필수는 아닙니다. 위험하거나 반복적으로 압박받는 상황에서는 설명보다 벗어나기와 도움 요청이 먼저입니다.
집에서 5분 동안 하는 경계 세우기 연습
부모가 친구 역할을 맡고 실제로 일어날 법한 부탁을 하나씩 제시합니다.
- “오늘 네 물건을 빌려줘.”
- “단체 채팅방에 이 사진을 올리자.”
- “엄마에게 말하지 말고 같이 가자.”
- “싫다고 하면 우리랑 못 놀아.”
아이는 멈추기 → 짧게 말하기 → 대안 또는 벗어나기 순서로 답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거절했을 때 일부러 설득을 멈추고 이렇게 반응해 주세요.
“알겠어. 네 선택을 존중할게.”
거절 문장만 훈련하는 것보다 거절이 존중받는 경험을 함께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전사회성은 실제 장면에서 완성됩니다
제가 실전사회성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은 문장을 외우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입니다. 편의점, 대중교통, 공원, 식당, 또래 활동처럼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는 장소에서 아이가 직접 선택하고 조정해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만 아이를 갑자기 혼자 두는 것은 실전 훈련이 아닙니다. 어른이 개입할 수 있는 안전한 범위 안에서 아이가 먼저 시도하고, 끝난 뒤 함께 장면을 복기해야 합니다.
- 무엇이 불편했는가?
- 몸에서 가장 먼저 어떤 신호가 왔는가?
- 어느 순간에 멈출 수 있었는가?
- 다음에는 어떤 짧은 문장을 사용할 것인가?
- 거절한 뒤 관계는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대답이 아니라, 다음 장면에서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감각입니다.

부모가 피해야 할 네 가지 반응
“왜 그것도 말을 못 해?”라고 다그치기
수치심이 커지면 다음 상황을 숨길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먼저 “그 순간에는 말하기 어려웠구나”라고 장면을 이해해 주세요.
부모가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하기
위험한 상황에는 즉시 개입해야 하지만, 모든 갈등을 부모가 대신 정리하면 아이가 자기 문장을 사용해 볼 기회가 사라집니다.
상대를 나쁜 친구로 단정하기
한 장면만으로 관계 전체를 판단하기보다 부탁의 내용, 반복성, 힘의 차이, 거절 뒤의 반응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완벽하고 예의 바른 설명을 요구하기
경계는 토론에서 이겨야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안 할래”라는 짧은 문장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부모용 체크리스트
다음 문항 중 여러 개가 반복된다면 아이와 구체적인 장면을 연습해 보세요.
- 아이는 부탁을 받았을 때 생각할 시간을 요청할 수 있다.
- 싫거나 불편한 몸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 짧은 거절 문장을 한두 개 사용할 수 있다.
- 상대가 실망해도 자신의 선택을 유지해 본 경험이 있다.
- 돈·물건·사진·신체 접촉에 대한 기준을 알고 있다.
- 압박이 계속될 때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
- 도움을 요청할 어른을 두 명 이상 말할 수 있다.
- 거절한 뒤에도 건강한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는 경험이 있다.
어른의 즉각적인 개입이 필요한 경우
다음 상황은 아이의 사회성 연습만으로 맡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 돈이나 물건을 반복해서 빼앗기거나 강요받는 경우
- 사진·영상·개인정보 전송을 요구받는 경우
- 신체 접촉이나 성적 농담 때문에 불편하거나 두려운 경우
- 비밀을 강요하거나 가족·교사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
- 거절 뒤 따돌림, 협박, 보복이 반복되는 경우
- 등교 거부, 수면 변화, 신체 증상처럼 일상 기능의 변화가 이어지는 경우
이때는 아이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안전을 확보하고 학교·보호자·관련 전문가와 함께 상황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회성은 ‘예’와 ‘아니오’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힘입니다
친구를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지키는 아이, 거절을 들어도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 아이, 의견이 달라도 다시 협력할 수 있는 아이. 이것이 우리가 길러야 할 사회성입니다.
오늘 아이에게 “싫으면 싫다고 말해”라고 조언하기 전에 한 번 물어보세요.
“네가 거절해도 나는 네 편이고, 건강한 친구라면 네 선택을 존중해야 해. 우리 어떤 문장으로 말할지 같이 연습해 볼까?”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눈치가 없고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아이|타인의 감정과 의도는 어떻게 배울까?
- 친구가 없는 아이|혼자가 편한 것과 사회성이 어려운 것은 다릅니다
- AI 시대에는 왜 아이의 사회성이 더 중요해질까?
출처 및 참고자료
- 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 Problems With Peers: How to Help Your Child Navigate Social Challenges
- CDC, Peer Connection and Support
- CDC, Management of Classroom Social Dynamics
- Yosep I, et al. A Scoping Review of Assertiveness Therapy for Reducing Bullying Behavior and Its Impacts Among Adolescents. Journal of Multidisciplinary Healthcare. 2024.
이 글은 일반적인 교육·심리 정보이며 개인에 대한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안전이 위협받거나 일상 기능의 어려움이 지속되면 학교 및 관련 전문가와 상의하세요.


답글 남기기